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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 <헤겔>의 생애, 철학사상 그리고 영향

by Green DJ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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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생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1770827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인 아버지 게오르크 루트비히 헤겔은 운송회계사 고문이었으며 어머니 크리스티네 루이제 프롬은 개인교수뿐만 아니라 고대어 및 현대어 그리고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는 슈투트가르트의 공립 김나지움에서 수업을 받게 함으로써, 헤겔을 학문적으로 교육시키는 데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18세에 튀빙겐의 신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2년 동안 고전 문헌학을 전공으로 하는 슈 뉘러,, 철학과 수학을 전공으로 하는 플라트, 벡아래에서 공부를 한 후,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잇달아서 3년 동안 르 브레, 율란드눌란드, 스토리 그리고 플라트의 지도하에서 신학과 관련된 학문을 공부한 끝에 슈투트가르트의 신교 총무원에서 실시한 신학과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과 지원생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설교사직을 선택하였으며 신학이 가진 고전문학 그리고 철학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신학 공부에 충실하였습니다. 신학과 졸업 후,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직업들 가운데 실제 설교사직에 별로 구속되지 않는 직업, 이를테면 고전문학과 철학 연구에 필요한 여유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외국에서 상이한 조건 밑에 생활하면서도 짬을 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러한 직업으로서 가정교사직을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찾았으며, 여기에서 헤겔은 결정한 삶의 과제인 학문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6년간 이 두 도시에서 시간을 보낸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철학에 마음과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나 대학의 명성은 그의 장래를 위해 보다 훌륭히 공부할 수 있고 그리고 교수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점, 전자의 불충분한 점에 관한 논문을 써 그곳에 지원하였으며, 얼마 후 박사학위논문,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의 공개 변론을 통한 심사에서 그곳 심사위원회로부터 교수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셸링 교수와 함께 "철학비판잡지" 두 권을 간행하였습니다. 1805년 헤겔은 예나 대학의 원외 교수 철학자로 채용됩니다. 1807년에는 헤겔 관념론의 핵을 이루는 정신현상학이 출판합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생활 면에서 헤겔은 살고 있던 셋방의 주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내 샬로테와 정을 맺어 그녀로부터 아들 루트비히 피셔를 얻지만, 1811년 2222살 된 처녀인 마리 폰 투허와 결혼을 합니다. 이 사이에 1808년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받아들입니다. 1812년 논리학이 빛을 보게 되며,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교수 자리를 옮긴 후 다음 해에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엔치클로 패디)을(엔치클로 패디) 출판합니다. 1816년 드디어 베를린 대학의 피히테의 후임 교수로서 초빙되어 여기서 사망할 때까지 연구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철학 사상

헤겔은 특히 철학자 중에서도, 철학 체계가 방대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독일 현지를 제외하면 그의 철학적 면모들 중 일면만이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한때 영국에서 유행하던 헤겔은 그의 논리학적 일면이었고,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헤겔이었습니다.
헤겔은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 있는 철학자로서 헤겔 이전 철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과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을 종합해 선험적으로 주어진 오성(Verstand)의 12가지 범주를 통한 인식과 사물이 일치되는 것을 진리로 긍정했으며, 경험되지 않는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인간 인식의 조건과 한계를 분명히 지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에서 말한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은 말 그대로 형이상학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모든 명제는 경험을 통하여 코기토 안에 포섭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칸트는 오성에 의해 경험이 될 수 있는 자아(코기토)와 달리 자아를 인식하는 자아인 초월적 자아의 구분을 짓고, 초월적 자아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존엄성을 부여한다고 했습니다. 초월적 자아에 의해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대우되어야 하며, 그리고 외부적인 것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닌 자신의 자유를 통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도덕 법칙을 따르는 존재론적인 근거를 갖게 됩니다. 칸트가 인간의 인식 조건과 한계를 구분 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 세상에서 도덕 법칙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 존재론적 근거로서 초월철학을 마련했던 것과는 달리 피히테는 절대자아가 자아(인간)를 통하여 자신의 자유를 실현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아는 비아(사물)와 구별되는 존재라서 절대자아를 포섭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셸링은 절대자(das Absolute)의 개념을 더 확장하여, 절대자는 단순히 인간 자아에 의해 그 이념(Idee)을 실현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외화 되어 사물(자연)을 산출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절대자로부터 사물이 산출되고, 그 사물은 잠재태로서 존재하며 종국에는 사물로부터 다시 절대자로 복귀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이 세상에서 절대자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합니다. 셸링의 절대자는 인간에 의해 포섭되면서도 동시에 자연을 산출하는 절대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자의 개념은 헤겔에게 비판을 받습니다. 헤겔은 슐라이허마허나 셸링과 같이 신에 대한 직관에 머물거나 단순히 이 세계를 유한자와 무한자로 양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에서 시작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와 역사를 절대자의 전체적인 움직임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의식(감각-지각-오성)-자기의식-이성-정신-종교-절대지(Das absolute Wissen)의 과정을 거치며 유기체와 같이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 진리요 절대자의 현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사회와 역사는 주관정신(의식-자기의식-이성)의 부정성을 지양하여 절대정신의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때 절대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이 세계와 철저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에 실현된 잠재태로서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그 유명한 헤겔법철학의 문장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독일 관념론에서 이성은 합리적 사고의 이성만이 아니라 신이 창조하고 주재하는 이 세상의 신적인 질서까지 포섭하는 인식론을 말합니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현실적인 것은 그렇기에 곧 이성적이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절대지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에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타자, 즉 부정성은 그 존재 자체가 말소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양을 통해 변증법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헤겔을 단순히 '정반합' 수준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A+B=C와 같은 변용이 일어난다는 게 아니라, 인식론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사회의 관계, 사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모두 다 그와 같은 불완전한 부정성을 포섭하여 발전해 나가는 진취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발전을 위한 '포섭'을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하여 왔지만, 최근에는 '부정성'의 개념에 포착하여 다시 헤겔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헤겔이 스스로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 철학 연구는 결과를 완성해 내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과 운동인 것입니다. 넓게 보면 결국 헤겔의 비판자들은 헤겔에 이미 포섭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향

헤겔의 철학은 '객관주의''이데아리즘'을 결합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진리는 전체의 개념에서 발생한다"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이론을 전개하며, 개인의 주관적인 인식보다는 전체의 개념과정을 중시합니다.

또한, 헤겔은 '논리학', '철학 역사', '사회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논리학'에서는 모든 것이 개념적 발전의 결과물이며, 개념이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또한, 그는 역사적 발전을 통해 인간의 이성과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이해하려는 '철학 역사'를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주체'라는 개념을 중요시했습니다. 끝으로, 헤겔은 인간의 자유와 독립적인 생각이 중요하다는 '사회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국가는 개인의 존엄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요한 주장 중 하나입니다.

헤겔의 철학은 독일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현대 철학에서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으며, 그의 역사 철학과 사회철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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